본문 바로가기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다카라츠카의 창시자 고바야시 이치조] 일본을 대표하는 무대예술 양식. 일본식 오페라 가부키에 대비되는 일본식 뮤지컬 다카라츠카

by 블로그신 2015. 2. 27.

 

 

 

 

일본을 대표하는 무대예술 양식이라면 당장 “가부키”를 떠올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중국에 “경극”이 그런 것처럼 일본식 오페라가 가부키인 셈이지요. 일본식 오페라가 가부키라면 일본식 뮤지컬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다카라츠카”입니다. 가부키가 일본 안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전통예술인 반면 다카라츠카는 서양의 뮤지컬을 가져와서 일본인의 정서에 맞게 정착시킨 무대예술입니다. 그리고 남성들만 출연하는 가부키와는 반대로 다카라츠카 무대에는 여성들만 등장합니다.

 

 

다카라즈카는 현재 한국에서도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의 공연 장르입니다.

 

다카라츠카는 원래 일본 효고현에 위치한 휴양도시의 이름입니다. 오사카의 우메다와 다카라츠카를 잇는 철도를 완성한 한큐전철은 온천이 있는 작은 마을 다카라츠카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새롭고 기발한 관광상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극장을 짓고 여성들만 출연하는 뮤지컬 레뷔를 무대에 올렸는데, 그것이 오늘날 다카라츠카라 불리는 무대예술의 시작입니다.

 

 

다카라즈카 제100기생 '첫 무대'

 

이 공연을 위해 1914년에 결성된 “다카라츠카 창가대”는 곧바로 “다카라츠카 소녀가극단 양성회”가 되었고 1919년에 다카라츠카 음악학교를 설립하면서 다시 “다카라츠카 소녀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학교의 설립으로 보다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체제를 갖추게 된 다카라츠카는 1924년 도쿄에 전용 극장을 개관하면서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무대예술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2년 뒤에는 전문잡지 “다카라츠카 그라프”를 창간하여 그 열기를 더욱 확산시켜나갔습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宝塚歌劇団)

1914년 한큐 전철의 창업자 고바야시 이치조가 전철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결성되어 그 첫공연 이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온 다카라즈카 가극단.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1928년에는 첫 해외 나들이로 유럽공연을 감행했고 이듬해에는 미국공연을 시도함으로써 해외 무대에서의 가능성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다카라츠카 소녀가극단이 “다카라츠카 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30년 8월 다카라즈카 쓰키구미(月組)의 공연 'Parisette'(출처 : 위키백과)

 

지금까지 열거한 이 모든 일들이 15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만도 놀라운 일인데, 그것이 전적으로 한 개인의 의지와 추진력에 힘입어 가능했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카라츠카의 창시자이자 절대적인 후원자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는 다카라츠카를 홀로 구상하여 세상에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본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직접 만들고 지휘한 사람입니다. 한큐전철의 창립자이면서 일본 정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그는 특히 문화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남달라 이전에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다카라츠카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마련된 거의 모든 제도적, 물질적 장치를 손수 마련한 장본인입니다. 그 결과 그의 생전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다카라츠카는 한큐그룹이 제작과 운영은 물론이고 재정적 지원에 이르는 모든 부분을 책임지고 있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생존여건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다카라츠카의 창시자이자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

 

태평양 전쟁으로 한 때 다카라츠카와 도쿄의 두 전용 극장이 폐쇄되고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종전 직후 다카라츠카 대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55년에는 도쿄의 다카라츠카 극장이 다시 공연을 시작하면서 예전의 명성과 인기를 회복했지만 그로부터 불과 2년만에 창시자 이치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치조의 타계 이후 다시 국제 무대로의 진출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는 마침내 본고장 뮤지컬을 그대로 가져와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한 때 시대의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하지 못해 고전을 면치 못한 적도 있었지만 만화 원작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이 소설과 영화로 널리 알려진 소재들을 찾아 무대에 올리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여전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출처 : http://nyxity.com)

 

다카라츠카의 정신은 그들이 내세우는 표어 그대로 “아름답게, 맑게, 정직하게”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주로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완전한 사랑을 무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고 그것이 여성관객들로 하여금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흔히 여성들만 무대에 등장한다는 사실 때문에 남성 관객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소녀 팬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성들이 연기하는 완벽한 남성상을 동경하면서 그들이 펼치는 헌신적인 사랑에 매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카라츠카 배우들은 무대를 떠나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현실이고 다카라츠카가 보여주려는 것은 꿈과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배우 스스로도 현실의 문제에 매달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낭만적인 이야기가 힘을 잃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다카라즈카 시절의 아마미 유키 from minorwaltz on Vimeo.

 

다카라츠카의 힘이라면 무엇보다 그 전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의 한 세기를 이어온 역사 속에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전통을 만들고 또 지켜왔습니다. 그 전통에는 시대의 변화가 녹아 있지만 그 속에는 분명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습니다. 시대의 조류를 쫓아 다양한 소재들을 수용하면서도 늘 일본적인 무엇인가를 고집합니다. 시작부터가 서양의 뮤지컬을 모델로 삼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작정 그대로 무대에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50년이 더 지나서야 본고장 뮤지컬을 그대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고 해외 공연에서는 언제나 일본의 전통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반드시 포함시킵니다.

 

 

다카라츠카 공식 홈페이지 메인 화면

 

그러나 이러한 역사와 전통이 지금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카라츠카의 대중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무턱대고 일본적인 냄새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서구적인 주제와 소재들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다시 일본인들의 정서에 맞게 고쳐나갔습니다. 탭 댄스에서부터 탱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춤이 펼쳐지지만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체취가 스며있어 그것이 서양 문물의 홍수속에서도 다카라츠카의 열광적인 팬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다카라츠카의 오늘이 있기까지 창시자 이치조의 역할과 공헌이 절대적이었지만 그가 없는 지금 다카라츠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다카라츠카의 열성 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다카라츠카의 해외공연에까지 따라가서 열광적인 성원을 보냅니다. 다카라츠카는 관객들의 요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관객들은 이러한 다카라츠카를 그들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카라츠카의 창시자 고바야시 이치조는 “자립적인 여성”을 만들기 위해 다카라츠카 가극단을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다카라츠카의 근본 이념으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단지 볼거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다카라츠카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물을 만들고 연기하는 과정을 통해 한 여성을 진정한 생활인, 예술인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원들의 공동생활과 단체생활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숙사 생활을 통한 여성 공동체의 실현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경험이 무대 위에서도 일체감을 만들게 되고 이것을 보는 관객들 또한 함께 그것을 느끼고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실체화 한 다라카츠카의 포스터 -은하영웅전설-

 

이치조의 이런 이념은 오랜 세월과 숱한 풍파를 겪으면서도 퇴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카라츠카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일본 사회 곳곳에서 ‘아름답고, 맑고, 정직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국회에 들어가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또는 다른 방법으로 사회 속에 건강한 삶을 심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남다른 생각이 이처럼 오래도록 여러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경우를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책 속에, 혹은 제도 속에 갇혀 누군가 꺼내주기를 기다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처럼 날마다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이기에 더욱 신선하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틀림없는 것은 오늘날 고바야시 이치조는 한큐전철의 창시자이기 앞서 다카라츠카의 창시자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예술의 생명이고 예술의 힘이라는 것입니다.